한문의 세계는 아득한 창해와 같아 평생을 보아도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는 이미 묵은 문자가 되어버려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으니 그 끝은 어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글을 읽음이란 이미 완성된 길을 따라 걷는 것이요 글을 지음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니,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그 길 끝에 도달하지 않고는 가능할 수 있을까.

허나 그 많은 전적을 두루 다 읽어본 이는 있지 않았고 숱한 선현들도 한정된 책을 토대로 글도 짓고 시를 만들어 냈으니 어쩌면 나도 전현들의 자취를 다 밟지는 못하였지만 소회를 서술하여 묵어버린 문자를 다시 이어 생기가 돌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회는 외부의 접촉에 감발되어 일어나기도 하고 내면의 생각이 발해서 나오기도 하는데 현재 따뜻한 봄을 맞아 주위의 경물을 보면 수많은 감회가 일어난다. 그러나 그 감회는 마치 아지랑이와 같아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글로 드러내기 어려워 물이 흘러가듯 당시의 감회도 그때 바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당시 감회를 잊지 않고 기억해 읊으려 해도 운에 막히고 평측에 막히게 되니 손발을 묶은 채 수영을 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 그러나 전대의 시를 보면 마치 자유자재로 문장을 구사하고 생각지도 못한 표현들을 하였다.

이백은 내천에 흘러가는 꽃잎을 보고 ‘복숭아꽃 흐르는 물에 아득히 흘러간다.[桃花流水窅然去]’라고 표현했고, 노조린은 목욕하는 새를 보고 ‘홀로 너럭바위에 기대 춤춘다.[獨舞依磐石]’라고 표현했고, 두보는 산을 보고 ‘산이 푸르니 꽃은 불에 타는 듯[山靑花欲燃]’이라 표현했으니, 정말이지 무릎을 치게 만드는 표현들이다.

전현들도 나와 같은 경물을 보고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며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인데 어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한 물건을 보더라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며 방대한 전적들을 섭렵하고 수많은 경험을 토대로 나온 소치일 것이다.

아, 주옥같은 글을 가슴에 새겨 잊지 않고, 한 풀포기 한 나무에 있어서도 지나치는 법 없이 보고서 느낀다면 10분의 1이나마 이들과 비슷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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