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게임 in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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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즐거웠던 놀이를 잔혹동화로 바꾸어버린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열풍이 뜨겁다. 데스게임 장르의 클리셰를 따르기에 친숙하면서도 형형색색의 세트장, 리코더의 단조로우면서 기괴한 느낌의 OST 와 같은 새로움이 더해져  앉은자리에서 모든 에피소드를 몰아보게 되는 흡입력이 있다. 물론 배우 개개인이 가지는 매력은 말할 것도 없고.

만약 무대 배경을 조선시대로 바꾸어 투전판에서 돈을 잃은 기훈이 겪는 드라마로 만들어 본다면 어떤 게임이 좋을까?

첫 번째 게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는 단체전인데다가 절반에 가까운 사람이 떨어져야 하니 ‘석전(石戰)‘이 좋겠다. ‘석전(石戰)’은 음력 정월 대보름날 사람들이 넓은 거리에 모여 두 편으로 나뉘어 돌을 던져 싸우면서 승부를 겨루는 놀이다.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싸움을 잘하는 사람을 뽑기 위한 재주 겨루기에서 점차 한 해의 길흉을 점치는 민속놀이로 자리잡은 모양이다. 아침엔 아이들이 작게 돌팔매질로 시작해서는 저녁이 되면 어른들까지 가세해서 거의 천 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편을 먹고 서로 돌멩이와 나무막대기를 가지고 치고 반드며 전략과 전술이 판치는 큰 싸움판이 되었다고 한다. 살이 찢어지고 머리가 깨지는 일은 다반사에 종종 죽어나가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과격한 ‘놀이’ 였다.

每於月元。隊左右。角彼此。手以石。石以戰。衆石交投。雨下霰集。惟雌雄是決。限月盡乃已。捷則辦一年之吉。否則凶。其所以力于戰而不知止者。一年之吉凶。動其心也… 乃敢血頭顱。肉肌膚。使之裹頭裂足。喪氣褫魄。顚縮於溝壑而不敢喘。然後快於心。揚揚然曰。吾其勝矣。
매년 정월 보름이면 좌우로 편을 갈라 각축전을 벌이는데 손에 돌을 들고 돌로 싸운다. 돌 무더기를 서로 던지며 비가 내리듯 싸락눈이 쌓이듯 오직 자웅을 겨루기를 한 달이 다해야 그친다. 이기면 한 해가 길하고, 지면 흉하니, 싸우면서 그칠 줄 모르는 까닭은 한 해의 길흉이 마음을 움직여서이다……. 머리가 깨져 피가 나고, 살갗이 찢겨 살이 드러나니 상대가 머리를 싸매고 발이 갈라지게 하고서야 넋이 나가고 혼이 빠져서는 도랑에 쪼그리고 앉아 숨도 못 쉴 정도가 되고서는 마음이 시원하여 의기양양하게 말하기를 “내가 이겼다.” 한다.
《졸옹집(拙翁集) 》석전설(石戰說)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영국 잡지 '그래픽'에 실린 석전
영국 잡지 ‘그래픽’에 실린 석전

두 번째 게임
‘설탕뽑기(a.k.a 달고나)’ 는 개인전인데다가  뽑는 운도 작용해야 하니 ‘투호(投壺)’가 괜찮을 것 같다. 병에 화살을 던져 집어 넣는 놀이인데 옛 경서에도 나와있는 유희이기 때문에 선비들도 즐겨했다. 그림은 신윤복의 나무 밑에서 투호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임하투호(林下投壺).

오징어게임에서는 각기 다른 입구 모양을 고르게 한 뒤 총 4개의 화살을 던져 하나라도 넣으면 성공!

“o, oo, oOo, OOO 중 하나를 고르시오”

나무 밑 투호 놀이 (임하투호 林下投壺)_신윤복
나무 밑 투호 놀이 (임하투호 林下投壺)_신윤복

세번째 게임
줄다리기는 조선시대에도 있었던 게임이니 그대로 가도 좋겠다.

줄다리기〔繂曳율예〕

발꿈치 굳게 디딘 채 일제히 목을 뒤젖히는데 
얼굴을 들어도 밝은 달은 눈에 안 들어오네
千趾錯植項齊彎
仰面不見天月明
..
당사자는 마치 생사를 결판 짓는 듯하니
구경꾼들 미처 승부를 논할 겨를 없네
當下若將決生死
傍觀未暇論輸贏

홀연히 산이 무너지듯 웃음소리 터지면
줄과 깃발 늘어뜨린 채 패잔병을 끌고 가네
忽如崩山笑不休
轍亂旗靡曳殘兵

《매천집(梅泉集)》 상원의 잡영(上元雜咏), 황현(黃玹, 1855~1910)

네번째 게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에피소드였던 ‘구슬치기’.  마음이 맞는 친구, 심지어 부부까지 갈라 놓은 잔인한 게임. 1:1 승부이면서 목숨을 걸고 할 수도 있고, 양보를 할 수도 있어야 한다면 널뛰기(跳板)가 어떨까. 널판지의 길이에 따라 몇 미터는 족히 솟구칠 수 있으니 아찔한 긴장감이 더 해질 수 있을 듯 하다. 한 사람이 균형을 잃고 떨어지면 탈락. 죽어라 뛰는 무뢰배 덕수, 다리 힘도 없는 일남 어르신을 굳이 널판지 위에 세워야 하는 기훈,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살포시 뛰다가 슬쩍 발을 내려놓는 지영.. 흑…

이웃집 여자아이들 판교 서쪽에서 널을 뛴다네
언니는 높이 오르고 동생은 낮으니
제 힘이 모자란건 생각도 않고
맞추기 어렵다고 언니한테 투덜거리네
隣丫跳板板橋西
阿姊全高阿妹低
不念兒家身忒健
喃呢罵姊苦難齊
《담정유고(藫庭遺藁)》 상원리곡(上元俚曲), 김려(金鑢, 1766~1821)

김한용 작가의 작품집 중
김한용 작가의 작품집 중

다섯번째 게임
유리 징검다리 건너기. 무엇 보다 순서가 중요했고, 잘못 된 선택을 했을 때 생각할 틈도 없이 떨어져 내리는 속수무책의 참가자들을 보며 모골이 송연해졌었다. 조선시대에 비슷한 놀이로는 다리밟기(답교踏橋)가 있다. 다리(橋교)를 밟으면서 일년 내내 다리(脚각)에 병이 생기지 않기를 기원했던 정월 대보름 풍속이다. 서울에서는 주로 청계천의 광통교와 수표교가 다리밟기 명소로 알려져 이날 밤이면 사람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통행금지까지 풀어주니 신나게 야행을 즐길 수 있는 좋은 핑계가 되어 남녀노소가 쏟아져 나왔을 당시의 열기가 상상이 된다.

아 물론 잔혹한 게임 속에서 다리는 푹푹 빠져 떨어지는 함정이 가득하겠지만.

그림은 대보름 야간 다리밟기 모임을 그린 ‘상원야회도’ 인데  청계천박물관 ‘도성 제1의 다리 광통교’ 온라인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전시기간: 2021.06.10~11.07) 링크

 

마지막 게임
원래 오징어게임은 여러 명이 하는 놀이인데 남아 있는 참가자가 둘 뿐이라 단촐한 격투게임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땅에 그림을 그려놓고 하는 놀이 중에는 긴 역사를 가진 ‘망차기(돌차기, 목자치기, 사방차기..)’가 있고, 비슷한 것으로 좀 늦게 들어온 망줍기도 있다. 문헌으로 남아 있는 기록은 없지만 아이에게서 아이로 전해져 내려오는 놀이문화이고 나 역시 땅따먹기라고 부르며 재미있게 했던 기억이 있다. 오늘도 길을 가다 망줍기가 그려진 바닥을 봤다. 아이들의 놀이는 이렇게 계속 쭉 이어지려나보다.

오늘도 계속되는 놀이
오늘도 계속되는 아이들 놀이

오징어게임을 찍으면서 이가 6개가 빠졌다는 감독의 치아건강을 생각한다면 시즌1으로 그저 만족해야겠지만 워낙 전세계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보니 시즌2의 제작도 기대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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