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과정 나의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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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려보니 서울이었다.

정말 아무 기대가 없었던 시험이었다. 기대가 없었다고 말하면 너무 이상하게 들리려나.

더 정확히 말하면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 결과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시험이었다.

내 서당 생활은 참 긴 시간이었다. 고작 시험 하나에 모든 의미를 평가받을만한 그런 쉬운 시간이 결코 아니었다. 내가 서당에서 보낸 모든 시간들을 고작 이 시험 하나로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평가받기에 난 너무 억울했다. 긴 시간 동안 어디를 향해 가는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참 열심히도 달려왔다. 처음에는 그저 한문이 재밌어서, 또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과의 시간들이 행복해서였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늘 스스로 한계에 도전하며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내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어 더 열심히 했다. 물론 나는 멈춰있는데 발전하는 동생들, 선배,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악물고 버틴 시간도 적지 않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선배들도, 동생들도 하나 둘 다들 제 살길을 찾아서 떠났다. 한문과 관련된 일이나 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다른 꿈을 찾아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매번 서당에 남았다. 남아서 반복, 또 반복.

떠나기엔 지금까지의 공부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새로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그만한 열정과 자신이 없었다. 무엇을 고집하며 버틴 시간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묵묵히 시간을 견뎠다.

그러나 언제까지 서당에서 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한 한문공부를 이용해 무언가 할 수 있었으면’, ‘해도 해도 부족한 공부’, ‘아직 더 하고 싶은 공부를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계속 할 수 있으면’ 등등 여러 바람들이 있었고, 그 모든 요소를 충족시키는 것이 여기 고전번역원 연구과정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과 현실은 달랐다. 내가 보낸 시간들과 했던 공부들에 대해서는 한 치의 부끄러움 없이 당당했지만, 막상 시험을 보려니 긴장되고 떨렸다. 긴장되고 떨린다는 것은 늘 그렇듯, 자신이 없어서이다. 그렇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렇게 오랜 시간 했는데도 실력에 대한 확신과 자신이 없었다. 매일 새로운 글을 예습할 때마다 풀리지 않는 벽에 부딪혔고, 그런 하루에, 그런 공부에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려니 이상하게도 더 위축되고 자신이 없었다. 시시콜콜 늘어놓으면 한 편 두 편의 글로는 끝나지도 않을 사연과 과정이 있지만, 결국엔 모든 것이 변명일 뿐인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해 이상은 적지 않겠다.

아무튼, 시험을 준비하던 내 마음은 정말 단언컨대 결과에 대한 기대나 바람이 하나도 없었다. 앞서 이야기했듯 지금까지의 서당생활이나 공부를 이 시험의 당락에 의미를 귀결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한 시험 결과를 기대하면서 준비하기엔 당장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고 시험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는 시험이었다. 사실 먼저 서당을 졸업하고 연구과정에 간 선배들도 모두 연수과정을 거쳐 연구과정에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연수과정에 가보지 않고 연구과정에 바로 응시하는 나로서는 준비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고전번역교육원 홈페이지에 교육 과정이 대강 나와 있지만 시험 문제는 어디서 어떻게 나는지, 연수과정에서는 대체 진도를 얼마나 나가는지 등등 알 수 없는 게 많았고, 알 수 없는 것은 곧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경험을 위해 가을학기에 입학했던 방통대를 죽기 살기로 노력해 조기졸업을 하고 준비 하나 없이 시험을 봤던 기억은 이번 시험을 볼 때 아주 큰 도움이 되었지만,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한 번 어설프게 봤다가 떨어진 기억에 불안감만 증가시킬 뿐이었다.

시험을 한 달 앞두고 고민하던 나는 결국 나는 연수과정과 연구과정 둘 다 동시에 지원했다. 연수과정을 거치지 않고 연구과정에 응시를 한 것도, 연수과정과 연구과정 시험에 동시에 응시한 것도 여기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냥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시험에 둘 다 접수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그 이후로는 시험의 결과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내가 현재 준비할 수 있는 공부만 했다. 그때까지만해도 나에게 그 다음은 없었다. 오직 시험을 위한 준비만 있었을 뿐.

돌이켜보면 시험을 보고 떨어진 내가 나 스스로 견디기 어려울까봐 시험의 결과가 나에게 주는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미리 수없이 마음을 다잡았던 것 같다. 시험에서 떨어졌어도 괜찮았겠지만, 사실 괜찮지 않았기에 미리 준비했던 것이다.

시험은.. 딱 생각한만큼,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어려웠고, 내가 준비한 부분에서 나온 것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읽었던 시경은 배우지도 않은 〈소아(小雅)〉에서 나왔다. 배우지 않은 곳에서 낼 거라고 예상 안 한 것도 아니고, 풀면 풀 수 있었을텐데 다른 글을 풀며 시간을 끌다가 결국 한 줄도 못 쓰고 제출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진이 빠질 정도로 최선을 다했지만 끝나고 보니 그냥 허무하고 허탈했다.

수험자의 입장에서는 일주일도 피를 말릴 만큼 긴 시간이지만 이번 시험을 보고 나서 나는 정말로 편안했다. 연수과정에 붙든, 연구과정에 붙든 내게 주어진 길 안에서 다시 최선을 다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으니까. 마음이 편안해도 너무 편안했는지 결과가 나오는 날 아침에도 난 그 사실을 잊은 채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화가 울렸다.

무심코 집어든 핸드폰 화면에는 낯익은 번호가 떠 있었고, 딱 그때부터 내 심장도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혹시..

순간 빨라진 심장소리를 느끼며 받은 수화기 너머로 행정실 직원분이 너무나도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시험 결과 확인 하셨어요? 연수과정이랑 연구과정 둘 다 합격하셔서…”

딱 거기까지만 들렸다. 그 뒤에 한 말은 잘 기억이 안 난다. 그 뒤에 선택을 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당연히 연구과정 간다고 했겠지!

딱 그날 이후로 하루하루 내게 너무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렇게 정말로 정신없는 며칠을 보냈고, 정신을 차려보니 서울이었다.

하루 만에 알아보고 계약한 자취방에서 부모님은 이미 하룻밤 주무시고 떠난 날 저녁, 많은 생각이 들었고, 만감이 교차했다. 설렘과 기대, 불안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찾아왔다.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가 넘어가는 밤이었다.

이렇게 나의 오랜 서당 생활은 끝이 났다. 하지만 끝은 결국 또 하나의 시작.

이제는 함께 공부하고 기쁨을 느끼고, 또 함께 고민할 동기들이 있기에 설렘과 기대 쪽으로 좀 더 무게를 실어 또 다시 힘차게 한 걸음 내딛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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