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등(獵等)의 대가(代價)

steppingstone

중국 송나라 때 주자가 제자 여조겸과 함께 편찬한 《근사록(近思錄)》이라는 책에 학문과 관련하여 이런 말이 나온다.

學必有序, 不容躐等, 積累而高, 必自下始.

“배움은 반드시 차례가 있어서 등급을 건너뜀을 용납하지 않으니, 많이 쌓아 높아짐은 반드시 아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말도 있다.

學者當以聖人爲準的, 然貪高慕遠, 躐等以進, 非徒無益, 而又害之也.

“배우는 자는 마땅히 성인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높은 것을 탐하고 원대한 것을 사모하여 등급을 건너뛰어 나아가면 한갓 무익할 뿐만 아니라 또 해치게 된다.”

모두 ‘엽등(躐等)-등급을 건너뜀’을 경계한 말이다. 배울 때는 낮은 단계에서부터 차근차근 기초를 다진 후에 점차 높은 경지에 이르러야 하며, 기초가 단단하지 않은 채 바로 어려운 것을 보려고 하면 도리어 학문에 해만 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엽등’하여 연구과정에 진학한 나로서는 읽는 순간 섬뜩해지는 구절들이다. 연구과정에 오기 전, 연수과정 마지막 1년 간 한두 과목만 배우면 되었기 때문에 남는 시간 동안 연구과정 시험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본격적으로 시험을 준비하기 전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서 무작정 원서를 접수했는데, 이렇게 친 시험에서 덜컥 붙을 줄은 정말로 몰랐다.

일단 오기는 왔는데, 엽등의 부작용은 곧바로 나타났다. 연수과정에서, 그리고 연구과정을 준비하며 당연히 읽어야 했을 기본 경서조차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이다.

경서는 기본적인 문리가 다 들어있어 한문에서 바탕이 되는 책이다. 연구과정에서는 기본 경서는 다 읽고 왔다는 전제 하에 수업이 진행된다. 선생님들께서도 수업을 하실 때 경서에 나온 구절들을 즉석에서 인용하시면서 현토를 설명하시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그런 구절이 있었던가’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일찍 오게 된 건 좋지만 그만큼 경서를 읽은 바탕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학기가 벌써 지나가버린 지금, 안 했던 것들을 이제 와서 하려니 오로지 한문만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연구과정 2년이 너무나도 짧게 느껴진다. 이 커다란 구멍을 어찌 메우나 조급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하루하루 아주 조금씩 부족한 점을 메워 가면 된다. 평생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면 다행히 아직 시간은 많다.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진실로 어느 하루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나날이 새로워져야 한다.”

– 《대학(大學)》 탕지반명장(湯之盤銘章)
구독
알림
guest
0 답글
Oldest
Newest
본문 내 피드백
모든 답글 보기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