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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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여름 방학이 다 끝나간다. 학생이라는 신분이 있어야만 누릴 수 있는 장기 자유시간. 직장인의 길어야 일주일뿐인 짧은 휴가와는 급이 다르다. 하지만 7월 한 달 동안 방학특강을 듣느라 ‘학문을 놓아버려야’ 하는 방학(放學)을 방학답게 보내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진하게 한 번 놀아야 하는데. 최고령자의 기획력으로 젊은 동기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어야겠다는 사명감이 마구 솟아오른다.

지금은 세상이 이렇게도 태평하여 如今海內昇平久

조금만 춥고 더워도 놀려고만 생각하지 小寒薄暑思嬉恬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정약용(丁若鏞, 1762~1836) 〈臨津城樓避暑示南涑遂安〉

마침 풍광 좋은 괴산을 본가로 두어 방학 중에 내려가 있는 동기가 있어서 장소는 쉽게 결정했다. 역시 놀러가는 계획 세우는 것처럼 신나는 일이 없다. 가려는 계곡의 지도와 로드뷰, 온갖 블로그 후기를 뒤지고 뒤져 적당한 펜션을 하나 찾았다. 마침 전화드려보니 8월 초에 딱 1박2일 예약 가능한 방이 있다길래 날짜도 덩달아 정해졌다.

장소와 날짜만 정해지면 일단 계획의 절반은 완성이다. 나머지 절반은 참석자가 만들어 주는 것. 하지만 역시나 전원 참석은 힘든 일인지, 이런저런 사정으로 두 명이 빠진 여덟 명이 일단 참석하기로. 그런데 일주일 전 가기로 했던 동기 중 첫 코로나 환자가 나왔다. 방학 중 바쁜 일이 있어 그간 만나지 못했었던 터라 놀러가서야 볼 수 있을 줄 알았더니만 코로나라니. 이제 일곱 명.

그런데 출발 4일 전 또 한 명이 코로나 확진자와 접촉을 했다며 상황을 좀 봐야겠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다시금 유행하는 코로나로 일일 확진자 10만 명이 훌쩍 넘어가는 때인지라 여기저기 피해자 속출이다. 이제 여섯 명인건가. 게다가 아이들을 맡기고 과감히 탈출을 꿈꾸는 엄마 동기도 있어서 아이들이 갑자기 아프지는 않을지 출발 전날까지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럴 때는 운명론자가 되는 것이 좋다.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에 대하여 일희일비하지 말고 ‘어차피 갈 사람은 갈 것이요, 못 갈 사람은 못 갈 것이니라.’라는 생각으로 있다보면 스트레스가 적다. 출발 전날 확진자와 접촉했던 동기는 증상 없이 검사도 음성이 나왔고, 아이들도 아프지 않았다. 결국 이번에 갈 사람은 일곱 명이었나보다.

괴산에 도착하니 동기들 면면이 궁금하셨던 부모님께서 우리를 초대해주셨다. 부모님을 뵈니 그간 봐 온 동기의 좋은 성품이 더욱 납득이 되어 ‘내 친구의 집을 찾아서’를 컨셉으로 잡은 이번 여행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어디로 가 볼까 벌써 고민스럽다. 방학 이후로 다 같이 만나 식사를 한 것도 오래만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수다를 떨며, 어머님께서 무려 탁구 대회에서 타신 우승 상금으로 사 주신 오리백숙을 거하게 먹고 계곡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오르락 내리락 하던 태풍이 괴산에 잔잔한 비만 뿌리고 떠난 덕에 계곡은 딱 놀기 좋게 서늘했다. 어릴 때 여름휴가는 무조건 바다라고만 생각했는데 다녀보니 시원하기로는 계곡만한 곳이 없다. 튜브 위에 올라앉아 동동 떠다니며 무알콜맥주 한 잔을 들이키니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이 있다. 잠깐 쉬면서 컵라면도 먹고 보드게임도 하다가, 또 물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며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싶은 서늘함이 몰려오고서야 덜덜 떨며 물놀이를 마무리했다.

MT의 꽃은 바비큐. 내세울 만한 요리실력은 없지만 그래도 십수 년 주부 타이틀이 있는 사람으로써 뭔가 솜씨를 부려야 하는게 아닐까 싶은 걱정도 잠시, 씻고 나와보니 벌써 한 상이 차려져있고 고기는 정갈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알고보니 고기 굽기 마스터가 계셨던 것. 다들 손도 야무지고 부지런해서 착착 손발이 맞는 것을 보니 내 보잘것없는 타이틀은 고이 접어 두어도 될 듯했다. 게다가 배운 사람들이라 그런가 절제를 아는지 술도 적당히 마셔서 음주 상태로 계곡에 들어가겠다는 사람을 말려야 하는 불상사도 없었다. 자칭 인솔자로서 얼마나 다행인지.

한 번 마시니 눈 서리를 더운 창자에 부은 듯 一吸霜雪沃煩腸

두 번 마시니 양쪽 옆구리에 날개가 돋친 듯 再吸羽翼生兩腋

세 번 마시니 어느덧 취향에 당도하여 三吸居然到醉鄕

해와 달 아스라하고 천지 좁아지누나 日月茫茫天地窄

《사가집(四佳集)》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벽통음(碧筩飮)〉

그렇게 한 잔 두 잔 하며 사가 선생이 말한 취향(醉鄕)에는 미처 당도하지 못했지만 더운 창자를 시원하게 씻어내리며 영문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던 즐거운 여름날이었다. 동기들에게도 두고두고 기억나는 그런 밤이 되었기를.

괴산 쌍곡계곡에서_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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